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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거리/스크랩

[펌]지상의 포도로 천상의 맛을 만들다 - 앙리 자이에

지난 2006년 9월 20일 부르고뉴 와인의 신으로 추앙받던 ‘앙리 자이예’가 사망했다. 그날부터 앙리 자이예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와인은 폭등했고 바람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얼마 전 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뉴욕에서 그가 만들었던 1985년 빈티지 ‘크로 파랑투(Cros Parantoux)’를 3500달러에 샀다는 소식이었다. 독자들은 비싸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이 가격이라면 어떤 수집가도 눈독을 들일 정도로 싼 가격에 제시된 것이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심지어 서울에서 뉴욕까지 왕복 비행기 값을 더한다 하더라도….

와인 양조기법을 개선하면서 20세기 말, 앙리 자이예는 부르고뉴의 젊은 양조자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그의 포도밭을 물려받은 조카 에마뉘엘 루제(Emmanuel Rouget)를 비롯해서 장 니콜라 메오(Jean Nicolas Meo), 필립 샤를로팽(Philippe Charlopin) 등 젊은 기수들은 앙리 자이예의 추종자로서 그룹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앙리 자이예의 생각과 행동에서 배운 것들을 통해 새로운 느낌과 감각, 실력을 지닌 부르고뉴 와인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앙리 자이예의 정신은 후대로 이어지면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더욱이 부르고뉴 와인의 특징상 양조기법이 가족 간의 비전(秘傳)처럼 은밀하게 전해져 내려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앙리 자이예의 후진 양성은 더욱 특별하게 보인다.

현재는 와인이 만들어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들이 포도밭에서 이뤄진다는 개념이 보편화돼 있다. 바로 이런 신념을 주창하고 앞장서서 행동으로 옮긴 이가 앙리 자이예였다. 밭에서 화학비료의 사용은 중단됐고, 저온 발효를 거치면서 와인의 품질을 개선시키고 자연을 반영하고자 했던 것이다.

앙리 자이예의 아버지는 병이 깨지지 않도록 볏짚으로 보호대를 만들면서 벌어들인 돈을 모아 포도밭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아직 필록세라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때였고 많은 밭이 황폐해진 채 버려지다시피 했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이때 취득한 본 로마네의 몇몇 밭이 앙리 자이예 와인의 근간이 된다. 지난 1922년 태어난 앙리는 형들의 와인까지 같이 만들면서 양조 경험을 쌓아나갔다. 42년 마르셀 루제와 결혼하게 되는데, 그녀의 삼촌이 DRC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앞선 테크닉을 배울 수가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 좋은 밭들을 소유하고 있던 메오 카뮈제(Meo Camuzet)에서 제안을 받게 된다. 리쉬부르, 크로 파랑투 같은 밭에서 소작을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훌륭한 토양을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면서 앙리 자이예의 명성은 높아져 갔다.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포도 경작과 양조에 대한 조언을 해주면서 앙리는 어느새 현장에서 70세가 넘는 나이가 됐다. 지난 96년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은퇴하지 않으면 연금을 몰수하겠다고 통보한다. 아들이 없었으므로 조카인 에마뉘엘 루제가 삼촌의 유지를 이어받게 된다. 그래도 앙리 자이예는 2001년까지 포도밭에서 일했다. 대지와 포도, 그리고 와인이 삶이나 다름 없었던 그는 끝까지 밭에서 떠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그가 와인을 만들면서 행한 일은 어찌 보면 가장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앙리 자이예는 언제나 “경작해라. 경작해라. 그리고 또 경작해라”는 말을 좌우명처럼 생각했다.

앙리 자이예가 만든 와인은 일반적인 부르고뉴 와인을 생각한다면 훨씬 강렬하게 느껴질는지 모른다. 그가 추구하는 와인은 ‘깔끔하고 순수해야 하며, 풍요롭고 풍부하며, 집중도가 높아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은밀하고 유연하며 부드러워야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많은 요소가 감춰져 있다. 다양한 면모를 복합적으로 지니면서 모가 나지 않은 균형감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이렇게 생각했다. ‘와인은 완벽한 균형미를 갖춤으로써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와인 칼럼니스트 고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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