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仁同)은 경상북도 칠곡군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신라 초기에 사동화현 또는 수동현으 로 불리우다가 경덕왕때 인동현으로 고쳐지고 후에 인동면이 되었다가 1977년 구미시에 편입되었다. 옥산(玉山)과 연복(延福)은 인동의 별호이다.
인동장씨[仁同張氏]는 크게 두계통으로 나누어져 시조를 각각 다르게 모시고 있다 첫째 계통으로 시조 장금용(張金用)은 태사공 장정필(張貞弼)의 원손으로 고려때 삼중대광에 올라 신호위 상장군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선(善)이 고려 문종조에서 금오위 상장군을 지냈다. 그후 자손들이 본향지인 인동현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인동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의 증손 국신(國伸)이 고려 때 봉정대부로 내사령을 거쳐 직사관을 지냈으며, 그의 현손 위(偉)가 통의대부로 검교군기감사에 올라 가세를 일으켰다. 인조때 이괄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일등공신에 책록되었던 만(晩)은 보국숭록대부에 올라 옥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지략으로 북변방어와 신흥 청국세력에 대한 정치와 외교에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한편 인조반정에 증산 현령으로 공을세워 옥산군에 봉해졌던 돈(暾)은 병자호란때 개천군수로서 호병(胡兵)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여 영돈령부사에 추증되었으며, 사진(士珍)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위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한쪽 팔을 잘렸으나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순절하여, 성주 등지에서 의병으로 활약했던 봉한(鳳翰), 상주 판관으로 전사한 홍한(鴻翰) 등과 함께 명망을 떨쳤다 덕령부윤 안세(安世)의 후손으로서 퇴계학파의 거두였던 현광(顯光)은 당세에 문명을 떨쳤던 한강 정구(鄭逑)의 문인(門人)이자 조카 사위이다. 1595년(선조 28) 학행으로 천거되어 나이 42세에 보은현감이 되었는데 약 21일간 관직에 있다가 사임하고 물러난 후 형조좌랑, 순천 郡守, 이조참판, 대사헌, 공조판서 등 20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오직 독서와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이인좌의난에 훈공을 세웠던 붕익(鵬翼)과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태소(泰紹), 숙종때 우승지와 대사간을 거쳐 부제학을 지내고 명신으로 이름났던 응일(應一), 병자호란 때 인동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경우(慶遇), 형조판서에 올랐던 석룡(錫龍) 등이 유명했다. 구한말에 와서는 태수(泰秀)가 한일합방의 울분으로 비분단식(悲憤斷食) 끝에 순국하여 이름을 떨쳤고, 근대에 와서는 대한매일신보주필을 지낸 지연(志淵)과 국문학자 지영(志暎), 민주당을 조직하여 부통령에 당선되었던 운석 면(勉)이 대표적이고, 조국광복운동을 주도했고 국무총리를 지냈던 창랑 택상(澤相) 등이 인동 장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상장군계의 인동장씨는 남한에 총 129,731가구, 538,80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계통으로 우리나라 장씨(張氏)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하는 인동장씨는 태사공(太師公) 장정필(張貞弼)을 도시조로 받들고, 고려 충렬왕때 국자진사 도평의녹사에 등과하여 보문각 대제학을 지내고 옥산곤에 봉해졌던 장계(張桂)를 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면서 인동현 발영전에 전거(奠居)하였다. 그후 후손들은 7세에 이르기까지 인동현 발영전에 세거하면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명문의 기틀을 다졌으며, 조선 성종 이후로 임지(任地)에 따라 서울 창동을 비롯한 충북 제천 및 단양과 경북의 영주, 예천, 문경, 의성, 자인등 전국 각지로 산거하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6세 손 안량(安良)이 조선초에 로 홍산현감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5형제자 크게 현달하여 순충적덕보조공신으로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증직되고 옥산군에 추봉되었으며, 안식(安式)은 훈련원 판관을 역임했다. 한편 시조의 손자로 광주 부사를 역임했던 용서(龍瑞)의 증손 자원(自遠)은 검교세자시강원 필선(檢校世子侍講院弼善)을 지낸 후 황해도 장연으로 이거하였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평안도 용천과 정주, 중화, 구성 등지에 집중세거하고 있다.
옥산군 안량(安良)의 후손에서는 그의 아들 5형제 중 장남 선손(善孫)이 승훈랑으로 의정부 첨서와 녹사를, 차남 경손(敬孫)은 사재감 주부를 지냈다. 말손(末孫)은 승문원 박사와 한성부 참군을 거쳐 함길도 병마도사를 지냈고, 1467년(세조 13)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예조좌랑으로 강순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세워 적개2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예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해주목사를 역임한후 성종때 연복군에 봉해졌다.
성종(成宗) 때 춘추관 편수관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던 말손의 아우 순손(順孫)은 연산군의 난정을 직간했다가 유배되었으나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경상도관찰사에 복직되고 대사헌, 좌찬성을 거쳐 1533년(중종 28) 영의정에 올랐다. 구한말에 와서는 홍문관 시독과 괴산군수를 지낸 기연(紀淵)과 의금부 도사를 거쳐 봉화, 영덕 등지의 현감을 역임한 후 한성판윤과 육군참장(陸軍參將)을 지냈던 화식(華植), 평리원 검사 봉환(鳳煥), 외부참서관 승환(昇煥) 등이 학문과 덕행으로 가통을 지켜온 인동 장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직제학계의 인동장씨(仁同張氏)는 남한에 총 129,731가구, 538,80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